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,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.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제20차 콘스탄티노폴리스 공방전 (문단 편집) == 개요 == >"스스로를 베네치아 사람이라고 부르는 자들아, 무엇보다도 기독교도로서의 의무를 다 하자. 전투가 시작되면 무슨 일이 생겨도 정해진 자리를 이탈하지마라. 위치를 벗어나느니 차라리 죽음을 택하라. 공화국은 우리의 선택을 존중할 것이다.” >---- > 베네치아 공화국 바일로 지롤라모 미노토 [[1453년]]에 벌어진 [[동로마 제국]]과 [[오스만 술탄국]][* 공방전 이전 오스만은 [[제국]]이 아닌 [[술탄|술탄국]]이었다.][* 1383년 [[무라트 1세]]가 [[술탄]]을 칭했고, 그 이전의 오스만은 공국을 뜻하는 '베이국'으로 불렸다. '베이(bey 혹은 beg)'는 [[튀르크]] 특유의 영주 개념이라 보면 된다.] 사이의 전투로, 동로마의 천년 고도이자 정교회의 심장이었으며 기독교의 5대 총대주교좌 도시 중 로마와 더불어 이슬람의 정복을 면한 유이한 곳이었던 콘스탄티노폴리스가 이슬람교도 튀르크인의 영토로 넘어간 사건이다. 그리고 [[기원전]]부터 이어져 온 '''[[로마 제국]]'''에 대해 종지부를 찍는 전투라고 할 수 있다. 학계에서 생각하는 ([[유럽]]) [[중세]]의 종말을 상징하는 유력한 사건들은 여러 가지가 있는데, 그 가운데 하나가 1453년의 콘스탄티노폴리스 공방전이다.[* 흥미롭게도 중세의 시작을 상징하는 유력한 사건들 중에는 476년의 [[서로마 제국]]의 멸망이 있는데, 서로마의 멸망으로 중세가 시작되어 동로마의 멸망으로 중세가 끝났다는 [[수미상관]]적 구조가 되어 의미가 깊다.] 이 전투에서는 중세의 종언을 고할 만한 무기인 공성포가 사용되었고, 중세를 상징하는 [[성벽]]의 의미도 무너졌기 때문. 이 전투로 [[소아시아]] 및 [[남유럽]]과 [[서유럽]] 및 [[중부유럽]][* [[영국]], [[프랑스]], [[독일]] 등의 지역]의 문화적, 정신적 연결 고리가 끊기고, 유럽 [[문명]]의 시조라고 할 만한 [[고대 로마|로마 제국]]의 최후가 [[이슬람]]의 손에 넘어갔다. 이 일로 [[고대 그리스|그리스]] - [[고대 로마|로마]]에 대한 고전학자들과 그들의 연구결과들이 서유럽으로 넘어가게 되고, [[르네상스]]의 계기를 제공하기도 한다. 또한 콘스탄티노폴리스의 함락과 함께 [[발칸 반도]]가 이슬람 국가들의 손에 넘어가게 된다.[* 다만 이렇게 쓰면 콘스탄티노폴리스가 함락됨과 동시에 발칸 반도 전체가 오스만의 손에 떨어진 것으로 오해하기 쉽지만, 사실과는 다르다. 이후에도 [[스컨데르베우]]가 이끄는 [[알바니아]]와 [[헝가리 왕국|헝가리 왕]]이 다스리는 [[크로아티아]], [[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]] 등의 저항이 있었기 때문. 다만 '여파' 문단에 소개되어 있듯이, 콘스탄티노폴리스를 정복한 오스만은 이들의 저항을 제압하기 훨씬 쉬운 상황에 놓이게 된다.] 이후 대량으로 유입된 이슬람과 기존의 [[정교회]], [[가톨릭]]이 섞이면서 지금까지도 펼쳐지고 있는 발칸 반도의 갈등의 전조가 되기도 한다. 이렇게 말하면 콘스탄티노폴리스 공방전이 세계를 바꾼 전투처럼 보이는데, 그런 것은 아니다. 동로마 제국 자체는 1204년 [[십자군]]의 콘스탄티노폴리스 함락 때 이미 한 번 멸망했고, [[니케아 제국]], [[트라페준타 제국]]과 [[이피로스 전제군주국]]이 동로마 제국을 계승한다. 이후 니케아 제국이 우여곡절 끝에 콘스탄티노폴리스를 차지하고 동로마 제국을 부활시켰으나, 이피로스는 일찌감치 1330년대에 동로마 제국에 의해 멸망했고(그나마 그 영토는 1340년대 [[스테판 두샨]]의 [[세르비아 제국]]에게 다시 빼앗겨 버렸다.) 오스만에 의해 동로마 제국(옛 니케아 제국), 트라페준타 제국 모두 크게 영토를 뜯기고 만다. 콘스탄티노폴리스 공방전이 벌어진 1453년 즈음에 이미 [[발칸 반도]] 대부분은 오스만 술탄국의 손에 들어가 있었으나, 썩어도 준치라고 재건된 동로마 제국 및 후계국들은 니케아 제국의 콘스탄티노폴리스 수복 이후 2백 년간이나 생존했다. 그럼에도 2206년간 이어진 로마가 멸망한 사건인 만큼 이전 시대의 종언을 선고하기에는 충분히 상징적인 사건이다. 그래서 이 전투를 중세의 마지막으로 보기도 한다. ||[[파일:external/upload.wikimedia.org/275px-Constantinople_1453.jpg|width=100%]]|| || 콘스탄티노폴리스 마지막 공성전. 15세기 프랑스 세밀화 ||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-BY-NC-SA 2.0 KR으로 배포하고,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.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.캡챠저장미리보기